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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슈아와의 만남 - 김시환 교수

2007.05.07 18:41

윤사무엘 Views:3723 Recommend:220

예슈아와의 만남


                김시환목사(미국 한밝교회, 예슈아대학교 교수)


** 머리말 **  인간 문제와 해답의 모든 것

** 서론 **    예수에의 새로운 접근


예수 충격(衝擊)

  1. 다시 만나야 할 예수

  2. 예수 추체험의 현장

  3. 예수 충격 I 

     - 누가 자신을 사형 당할 죄수로 인정하는가? -

  4. 예수 충격 II

     - 예수 충격에 대한 타락한 인간의 반응은? -

  5. 예수 충격 III

     - 예수 충격에 대해 회개할 사람들의 반응은? -

  6. 예수 충격 IV

     - 종합적인 인격 치유의 모델 -

  7.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는 아브라함

      -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아브람

      - 네 영혼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우르? 하란? 아니면 어디인가? - 

      - 아브라함은 무엇을 신뢰했고,

        무엇을 하나님께 물었을까? -


원죄론(原罪論)

 1. 죽음을 밭갈이하는 아담

      - 죽은 자는 스스로의 죽음을 인식 못한다. -

  2. 죄악을 변증하는 아담

      - 무화과 잎 치마, 아담의 대리 양심 -

  3.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 가죽옷을 입히시는 하나님의 눈물

        / 태초부터 있었던 속죄 제사-

  4.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최초의 살인자와 희생양 -

  5. 라멕의 노래, 라멕의 성

      - 에덴 동쪽 놋 땅의 어둠의 자식들 -

  6. 빛의 행진, 빛의 노래

      -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에녹의 노래 -

  7. 노아의 방주 문화(方舟文化)

      - 방주, 심판의 폭풍을 뚫고 나갈 생명의 문화,

        무지개와 방주에 각인 시킨 희망의 보증, 신앙 -

** 머리말 **

                 인간 문제와 해답의 모든 것

                   - 인간심리와 성경원리의 상관관계 -


  인간 심리문제를 과학(심리학)적인 논리에 의해 제대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0년을 넘기지 못한다. 더구나 단순한 심리 차원을 벗어나 영혼문제를 과학적으로 손대기 시작한 것은 50년도 안 되었고, 그나마 영혼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다’는 수준조차 아직 넘기지 못했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에서 심리학적 기초이론을 제공했다 할 수 있는 프로이트(S. Freud)는 인간 심리를 유물론적 관점과 진화론적 토대 위에서 세웠다. 또 그 이후의 서구적인 과학 풍토는 기독교적인 신학을 추상적인 철학 행위와 별 다를 바 없이 취급하였다. 그러면서 비웃음과 더불어 인류의 미숙한 시대의 수사학(修辭學)적인 사고법 정도로 밀어내, 사실상 실증주의적인 학계로부터 거의 추방하다 시피하고 있었다. 심리학계 역시 프로이트 이래 이런 오만한 지적 풍토의 영향 아래 기형적으로 전개되어 왔다.

  하지만 유물론이나 진화론이 실증주의적인 과학 이론의 유아기(幼兒期)에 발생한 일종의 ‘과학미신(科學迷信)’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참으로 비과학적 행위요, 또 학문에 대한 폭력 행위라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은 양차 대전 직후부터였다. 왜냐하면, 두 번 씩이나 벌어진 세계 대전의 근본 원인이 이 이론과 그런 사상을 품는 인간들의 자세와 깊은 상관관계가 있음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두 사상체계의 적자(嫡子)라 할 수 있는 공산주의가 엄청난 유혈과 폭력으로 등장한 후, 철의 장막 안에 갇힌 인간들의 인권을 무자비하게 유린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이것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런 상황 하에서 과학도 유아기적 미숙함을 벗어나 이 두 사상 체계의 비과학성을 인정하며 반성하게 되었다. 이것은 서구사회에선  대체로 70년대 초반까지 정리가 끝났었다고 할 수 있다.

  심리학계 역시 이러한 내적 변화 과정을 비슷하게 밟아 왔다고 할 수 있다.


  인간문제를 심리나 영혼의 영역에서 다룰 때, 기독교는 그 핵심을 죄(罪)로 보았다. 그러나 과학(심리학)은 스트레스와 노이로제 현상으로 보았다. 죄의 문제는 죄 자체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고, ‘죄의식(罪意識)’을 문제 핵심으로 보았다. 이제까지의 기존 심리학 입장에서는 죄를 노이로제 영역에서나 다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프로이트 이론대로라면, 인간 심리의 기능구조나 욕동(慾動) 체계로 보아 죄의식이라는 것은 있을 이유도 필요도 없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래서 이 죄의식은 인간을 지배하려는 종교적 음모(陰謀)에 의해 고의적인 심리적 최면(催眠)으로까지 확장되었다고 여겼다. 이것은 맑시즘 사회에서만이 아니다. 무신론적인 천민자본주의 사회의 대중문화 리더나 매체들의 유행심리이기도 하다. 그들은 죄의식을 심리적 질병의 한 종류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가벼우면 스트레스요, 무거우면 노이로제까지 간다고 보았다.

  하지만 모든 인간의 지배욕을 관찰 분석하던 아들러(A. Adler)는 인간의 모든 행동 동기는 프로이트가 말하듯이 그렇게 육체 본능인 성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리비도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갈파했다. 물론 거기에는 그 ‘종교의 음모’라는 것까지 포함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인간 내부의 권력욕은 성욕처럼 육체의 유기체적 매커니즘에 따르는 것이 아니고 추상적인 가치를 좇아 생명까지 내거는 열정임을 증명하면서, 그러한 열정은 언제나 추구해야 할 가치의 기준이 설정되어야 하고, 또 그에 따라 반드시 옳고 그름을 판별해야 하는 심리적 기제(機制)가 따른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중대한 심리학적 변신이었다. 왜냐하면 인간 심리의 내부구조 자체가 프로이트가 그렇게도 격렬하게 거부하려던 ‘양심 기제(良心機制)’를 지니고 있다는 주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설령, 그것이 권력욕에 종속된 것이라 해도, 독자적인 양심기제의 기능 자체의 존재조차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프로이트의 직계 제자였던 융(G, K. Jung)은 강신(降神) 현상과 무속종교(巫俗宗敎) 현상을 연구한 끝에 인간의 잠재의식 속에 작용하는 영적(靈的) 현상을 입증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말하자면, 심리학적 이론 그 자체로써 스승의 무신론적 사상체계를 여지없이 짓부순 셈이다.

  그 후, 프로이트의 제2대 제자였던 프랭클(V, Frankl)은 유태인으로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처참한 체험을 겪은 것을 토대로 ‘로고쎄라피(Logotherapy)'라는 새로운 심리 치료법을 개척하였다. 인간의 노이로제 현상은 단순히 육체적 이유나 심리적 이유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전혀 ‘철학적(영적)인 가치의 공백(空白)’을 인해서 겪어야 하는 ’실존적인 무저갱(Abyss) 체험‘ 때문에도 발생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노이로제가 다른 노이로제 현상보다 훨씬 넓고 깊게 인간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질병임을 설득력 있게 증명했다.

  거기에다 그는 이러한 ’영적인 노이로제‘를 치료하는 원리를 제시했는데, 그것은 인생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지혜를 줌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 또한 밝혔다. 그 지혜는 성적(性的)인 리비도나 권력욕을 적정(適正) 수준으로 조정하는 기술에 관한 지식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삶에 대한 목적이나 가치, 그리고 그것을 실현해 갈 도덕적 원칙이나 희생적 사랑에 관한 지혜들이다. 그는 그러한 지혜를 ‘로고스(Logos)’라 명명(命名)했다. 그것은 신앙인으로서의 그가 ’하나님의 말씀(Logos)' 이외의 것으로는 이 질병이 치유될 수 없음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심리학계의 대변동은 그 동안 기독교적 인간론이나 심리 이론이 학문적인 폭력에 의해 부당한 취급을 받아왔음을 드러내고 있다. 동시에 그 대변동은 인간심리나 영혼의 문제에 대해 기독교가 새로이 효율적인 접근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오늘의 기독교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초대 교회 사도들이 보여준 그 감동적인 권위와 힘을 회복해야 한다.

  이번에 내놓는 ‘예수 추체험(追體驗 / Jesus Re-encoutering) 원리’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노력하여 얻은 작은 열매의 하나로 여겨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기도 속에서 조심스럽게 신학계와 심리학계에 상장(上場)하는 바이다.  


  오늘까지는 기독교 심리학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고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 동안의 기독교 심리학계는 기존의 무신론적 심리학의 한 가지로서 인정받으려고 하는 웃지  못할 희극을 연출해 왔다. 기독교적인 원리와는 상관도 없는 프로이트 이론에 억지로 매달려 학계의 인정을 받으려 한 우리 모습을 이제는 반성해야 한다. 그것은 기독교 심리학이라 할만한 것도 못되었다.

  이제부터 참다운 기독교 심리학과 심리 치유법이 올바른 이론적 토대를 찾아, 그 위에서 구체적 체험의 현장을 형성해 나가는 풍토가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오늘의 인간 세계의 비극적인 삶의 현황이 그것을 절대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잘못되어 있는 교회를 개혁해 갈 핵심적인 일의 하나가 바로 이 작업이다. 그래야 올바른 성령운동을 일으키는 영적 기준이 튼튼히 서기 때문이다.

  이번 강좌를 통해 내놓는 ‘예수 추체험원리'는 물론 신약해석학 상의 새로운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도는 기독교적인 심리치료의 현장에서 나온 것이므로, 원래 ‘기존 심리학적 이론을 수렴(收斂)시킨 기독교 심리 치료법’이라 하면, 가장 적절한 정위(定位)가 되리라 본다. 하지만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 치유 원리에 따라 위의 심리학적 이론을 새로이 정리하고 전개시켜 가는 과정에 이 기독교 치유론이 나왔다 하는 편이 실상을 보다 정확하게 표현했다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필자는 이 원리를 먼저 현장에서 체험하고 난 후, 그것을 이론화시켜 가는 과정에 이 심리학적 이론들과의 상관관계를 정리해 왔기 때문이다.

  

  이번 강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리치료 현장을 우선 먼저 소개하기로 한다.

  인간 영혼과 심리 치료의 참된 원리는 본질적으로 예수 안에서만 나오게 되어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질적인 치료의 능력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지혜안에 모두 들어 있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심리치료 이론에 대해 믿어줄 만큼만 믿어 주고, 잘못된 것을 제대로 알아보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비기독교적인 심리학에 대한 잘못된 신뢰감은 일종의 미신적 최면 상태에 빠지게 한다. 그래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거기에서 절대로 빠져 나올 수 없게 된다. 오늘의 기독교 심리학은 아직 이 최면의 늪을 헤어나지 못한 상황이다. 이런 문제를 타개하지 못하면, 세상 초등학문의 학문적 폭력 즉 영적 억압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것은 신학적인 기능부전(機能不栓) 증세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새로운 성령운동에 치명적인 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서 이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한 결단을 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신학적인 기능부전(機能不栓), 성도들의 영적 퇴행성(退行性), 이것은 오늘의 크리스천이 당면한 가장 심각한 과제이다. 이 부전증과 퇴행성으로부터의 탈출, 이것은 기독교적인 ‘근원 사유법(根源思惟法)’으로서만 가능하다. ‘예수 추체험 원리’는 바로 이 근원사유법의 문이다. 여기에 그 문으로 들어서는 성경연구의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 서장 **


                        성경(4 복음서)을 통한

                   예수에의 새로운 접근

                         - 예수 사건의 심리적 순열조합(順列組合) -


  예수의 역사(歷史)가 인간에게 접근하는 형태는, 객관적으로 보건대, 오늘의 언론에 보도되는 사건과 같은 형태로 모든 사람에게 접근한다. 우선 성경의 기록자들에 의해 취사선택(取捨選擇)된 제한된 자료의 범위 내에서 사건이 보도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도 예수께서 인간에게 던지려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는 목적 하에 자료의 선택과 해석이 이루어져, 사건 단위로 각기 분해되어 소개(紹介)되고 있다. 그래서 예수의 삶은 전기적(傳記的)으로 다루어지기보다는 뉴스 기자의 노트에서 보이는 ‘사건 기록’을 닮아 있다. 따라서 복음서(福音書) 네 권은 모두가 ‘예수 사건의 집적물(集積物)’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각 사건들마다 유기적인 전후 관련성을 띈 통일성을 가지고서, 인류사(人類史)를 변화시킨 한 웅대한 인물의 역사(役事)를 제시한다. 그리고 각 사건들마다 부르짖는 메시지는 그 인물이 단순히 한 인간 영웅이 아니고, 전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라는 소리이다.  

  이로 인해, 당연한 결과이지만, 사건들 하나하나가 각기 독자적인 메시지 단위(單位)를 형성하고 있다. 동시에 세 공관 복음서(共觀福音書) 사이에도 저자(著者)에 따라 자료 선택과 사건 구성과 해석에 차이가 난다. 그러니, 요한 복음서와의 차이는 더욱 심할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 독자의 입장에선 다면적 관찰(多面的觀察)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심지어 동일 사건에 대해서조차 이런 다양성이 유지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건 이해에 있어서 혼란을 야기(惹起)시키지 않고, 메시지에 접근하는 데에도 훼방(毁謗)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상호보완적(相互補完的)으로 강렬한 메시지 효과를 발하고 있다.

  

  준비 단계 / 자료의 분류

  따라서 복음서를 읽는 독자(讀者)의 입장에서는 이 네 기자(記者)의 사건 수첩(手帖)을 대하는 자세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는 그것을 어느 하나도 버리지 말고 상호보완적인 자료로 신뢰하고 기록 자체의 순열조합(順列組合)에 나서야 한다.

  이 작업에서는 자연히 자료들의 분석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우선 이 조합이 가능한 자료들이 분류된다. 이 자료들을 ‘1차 자료’라 해 두자. 그 다음엔 내용상의 논리적 모순이나 불합리한 부분으로 분류되는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은 사건 자체의 의미와 내용의 깊이를 더 해 주는 중요한 보완자료로 기록해 두어야 한다. 그것을 ‘2차 자료’라 할 수 있다. 그 다음엔 동일 사건임에도 사건 진행상(순열배합)의 논리 자체가 나뉘어 지는 자료들이 있다. 이 경우엔 그 논리의 종류 별로 ‘이름을 주어’ 서로 대비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을 ‘3차 자료’라 하자.

  자료의 분석이 끝나면, 다음과 같은 추체험(追體驗)의 과정을 밟아 나간다.


  I. 성경 숙독(熟讀)과 사건 추체험(追體驗)

     동일 사건에 대한 4 복음서의 다양한 기록을 종합하여 사건을 재구성한다.

   이 재구성은 우선 1차 자료끼리의 확인 절차를 토대로 하게 된다. 우선 공관 복음서에서 확인된 공통부분을 모아, 사건의 굵은 줄기를 구성해 놓는다. 그 다음엔 성경 본문에는 빠져 있으나, 반드시 삽입되어야 할 동작이나 필수적 과정으로 거쳐야 할 말과 표정 또는 필연적인 환경 여건 등을 조합(組合)시키는 작업을 해야 한다. 물론 이 작업은 그 사건 현장의 공간적 특수성과 자연환경과 당시의 시대 문화적 상황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이런 작업을 하고 보면, 그 과정에서 사건 이해에 도움이 되는 2차 자료들을 선택하여 결합시킬 수 있는 합리적인 틈과 기회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2차 자료들을 알맞게 끼어 넣음으로써, 1차 자료만으로 구성된 줄거리만으로는 느낄 수 없었던 사건의 의미와 메시지가 강렬하게 다가옴을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그 당시 예수 사건의 실상이 대체적으로 드러난다. 이 과정을 여기에선 ‘1차 추체험’ 또는 ‘사건 추체험’이라 하기로 한다. 이 과정 에서는 언론 기관의 사건기자처럼 사건의 ‘외연적(外延的) 추체험’에 참여하는 셈이 된다.

   

II. 추체험의 분석

     4 복음서는 그 기록 내용과 해석에 있어서 상호 간에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사건 추체험’ 과정에서는 대체로 이 공통점을 토대로 한 자료들을 순열조합(順列組合) 시킨 것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비록 2차 자료들을 결합시키는 과정을 통해 사건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긴 했지만, 그것은 아직 사건의 실상이 지니는 복합성(複合性)을 드러내 주진 못한 단계이다. 이 말은 아직 사건의 진상에 우리가 도달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드디어 우리 작업은 자료간의 차이점을 사건의 순서 배열과 재구성에 어떻게 적용시킬지 고려해야 한다. 특히 그 차이점이 상호 모순이 될 만큼의 차이인지, 아니면 상호 보완적인 차이인지를 가려내야 한다. 이렇게 해서 같은 사건에 관한 자료들끼리 지니는 색깔의 차이 라든가, 내용의 차이를 하나의 틀 속에 용해시켜 넣을 수 있게 된다. 이 작업을 통해 3차 자료를 소화 흡수할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에 이르면, 그 사건 현장에 나오는 인물들의 입장에 서서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게 된다. 사실은 이런 정도까지 사건의 핵심을 투명하게 볼 수 있게 된 독자는 이미 예수님께서 자신을 고마워하고 기뻐하면서, 자신의 곁에 다가와 서신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네가 이제 제법 나를 알아보기 시작하는구나!” 하고 자신에게 말씀을 걸어오심도 느끼게 된다.

     이 단계의 작업을 ‘추체험의 분석’이라 한다.


 III. 추체험의 내면화

     이런 눈을 뜰 수 있게 되면, 자료 간에 모순이 심해 도저히 한 사건 속에 함께 조합시키기 어려운 경우를 만나도, 그 모순된 부분을 무시하지 않고 그대로 깊이 있는 메시지를 발굴할 수 있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자신의 마음도 열리게 된다는 뜻이다. 가령, 공관 복음서 저자들 시각과 요한의 시각이 엄청나게 다르게 느껴지는 경우를 당해도, 상호보완적 관련성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에 이르면, 바로 그 예수 심정에 접근하는 깊은 명상의 기도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해서, 나머지 자료들을 남김없이 조합시켜 갈 수 있게 된다. 그런 후, 성경에 표현되지 않은 부분을 면밀히 검토하여, 삽입이 잘못된 부분과 삽입을 누락시킨 부분이 있는지 살피면서 교정해나간다. 그 다음엔 사건 전개과정의 순서를 정확하게 바로 잡는다.

     이런 과정을 밟으면, 그 당시 사건 등장인물들의 정서와 신념과 삶의 자세 같은 것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동시에 그 살피고 있는 사건이 던지는 메시지의 윤곽도 역시 드러나기 시작한다. 동시에 예수 사건에 대한 수많은 사본(寫本)들 간의 차이도 본질적으로 극복할 수 있게 된다. 특히 옳지 못한 동기에서 고의적으로 원전(原典)의 내용이나 의미를 왜곡시키기 위한 범죄적인 ‘가감승제(加減乘除)’ 작업도 거의 확실하게 드러낼 수 있게 된다.

     이 단계를 ‘추체험의 내면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IV. 사건의 심리적 진행과정의 인화(印畵)작업

     그 다음엔 드러나기 시작한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정밀히 분석 관찰한다.

     하나님에 대한 자세와 접근 동기, 인간끼리의 관계에 대한 자세, 그리고 그러한 접근 과정에서의 정서의 흐름과 그에 따른 표정과 행동 선택에 이르기까지 그 심리적 전개과정을 분석하고 살핀다. 그러면서, 그 당시 사건에서 당연히 조화가 될 만한 심리적 흐름이나 정서 상태를 걸러내고, 심리적 흐름의 순서를 조합해 나간다.

     이런 작업은 놀라운 심리적 동화(同化) 작용을 일으킨다. 그래서 일단 뛰어든 사람에겐 차가운 관찰자의 위치에 계속하여 있기엔 힘이 든다. 마치 영화를 관람하는 사람이 그 영화 속의 인물에 동화되어 그 정서나 감정이 극중의 인물과 함께 흐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마치 탐정과도 같은 냉정성을 유지하고 관찰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최소한 자기가 살핀 내용의 객관성을 자기 자신만큼은 신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여기까지 이르면, 드디어 예수 사건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하나하나에게 인생의 ‘근원질문(根源質問)’을 던질 수 있는 준비가 끝난 셈이 된다. 그래서 그 인물들에게 이 예수 사건속으로 끌려오기 이전에는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무엇이었느냐고 먼저 물어야 한다. 그리고는 이 사건(예수와의 만남) 이후엔 그 대답이 어떻게 변했느냐고 물어야 한다. 그 근원 질문은 다음과 같다.

      i) 너는 어디로부터 왔느냐?

     ii) 너는 어디를 향해 가느냐?

     iii) 너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   

     iv) 너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이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실체를 드러내는 일이야말로 아주 중요하다.

     예수 사건 속으로 성경 독자 자신을 이끌어 들이는 계기는 바로 여기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이 심리적 실체가 드러나기 이전까지의 작업은, 사진 인화(印畵) 작업과 비유컨대, 네가 필름(Nega-Film)을 뽑아낸 단계라 할 수 있다. 그것으로는 우리는 ‘예수와의 직접적인  만남’에 이르지 못한다. 그 네가 필름은 반드시 포지 필름(Posi-Film)에다 인화(印畵)시켜 내놓아야, 비로소 사진은 제 색깔과 음영(陰影)을 드러낸다. 이 심리적인 실체를 드러내는 일이야말로 바로 포지 필름 인화작업이라 할 수 있다.

          


  V. 예수와의 만남

     그렇게 해서, 자신의 심리적 공간과 시간을 예수 사건 당시의 시공간(時空間)으로 이동시켜 간다.

     예수님은 이 순간부터 성경의 독자에게 ‘3인칭(三人稱)의 존재’가 아니다. 즉 단순한 ‘관찰의 대상’이 아니다. ‘2인칭(二人稱)의 존재’로 화한다. 즉 ‘내가 만나야 할 당신(너)’으로 화한다.  예수님은 이 순간부터 평가와 이해타산의 대상인 ‘그것’ 또는 ‘그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고, 대화자(對話者)로서의 ‘너’가 되어 내(讀者)게 다가선다. 그렇게 해서, 예수 사건에 대한 모든 기록은 단순한 정보(情報)나 해석을 요구하는 ‘종교적 교조(敎祖)의 행적’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의 심정을 가지고, 자기에게 다가서는 대화자로서 다가선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 주시는 분으로서 독자에게 어필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우선 2000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자신이 일으켰던 그 ‘폭풍과도 같은’ 일련의 사건들을 통로로 삼아, 독자들 앞에 나타난다. 아니, 단순히 나타난다기보다 다가온다! 그러면서 그는 나름대로의 표정을 지으며,  독자의 이름을 부른다.

     바로 이렇게 예수님과 만나는 체험, 이것이 성경을 통해 오늘도 가능한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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